타는 듯 붉은 태백, 청도서 태운 달집…세계 홀린 한국의 美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입력 2024-04-25 18:47   수정 2024-04-26 03:11

오는 11월 24일까지 계속되는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는 여느 때보다 한국 미술을 재조명하는 열기로 뜨겁다. 공식 행사장 말고도 도시 곳곳 병행전시로 열리는 한국 작가 개인전만 4개. 도처에서 열리는 한국 관련 전시를 합치면 10개가 넘는다. 역대 최대 규모다. 그중 가장 주목받는 건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그리고 이배 개인전이다. 각자가 나고 자란 고향 경북 울진과 청도의 정취를 이탈리아로 옮겨왔다. 올해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대주제 ‘이방인은 어디에나 있다’에 호응하듯, 이들의 작품은 베네치아 도심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여기 있었다’는 듯.
'BTS가 반한 추상화가' 유영국…점·선·면으로 그린 태백산맥의 물결
다양한 색채로 고향 '울진' 그려

어떤 예술가는 죽어서야 세상에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유영국(1916~2002·사진)도 그중 하나다. 단풍빛으로 물들어가는 산, 청록으로 일렁이는 물결…. 그의 회화 29점과 석판화 11점 등을 선보인 개인전 ‘무한 세계로의 여정’은 지난 17일부터 베네치아 퀘리니 스탐팔리아 재단 건물에 우뚝 섰다. 작가의 첫 유럽 개인전이다.

“선친께선 키가 아주 큰 미남이었어요. 쉬는 날이면 탱고를 즐겨 추셨죠. 생전 이탈리아를 찾으셨다면 좋은 시간을 보냈을 텐데, 아쉽게 그러진 못하셨습니다.” (유진 유영국문화재단 이사장)

유영국의 작품 세계가 본격적으로 연구된 건 비교적 최근 일이다. 2016년 유영국 탄생 100주기를 기념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 이후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작품이 해외 무대에 걸린 것도 지난해 미국 뉴욕 페이스갤러리 전시부터였다.

색채의 미학과 기하학적 형태를 극단으로 끌고 간 그에겐 ‘한국 1세대 모더니스트’ ‘최초의 추상화가’ 등 여러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미술계에선 “색의 깊이와 형태의 정신성이 마크 로스코, 몬드리안에게 견줄 만하다”고 평가받는다. 미국 미술 전문 매체 아트뉴스는 “유영국의 추상화는 눈부시게 밝고 매혹적이며, 대비되는 색면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는 작품”이라며 올해 비엔날레에서 꼭 봐야 할 전시 10선 가운데 하나로 소개했다.

이번 전시는 단순화된 점·선·면에 자연을 담은 1960~1970년대 대표작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 도쿄에서 미술을 공부한 유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귀국했다. 분단과 전쟁, 독재를 목도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선에 오르고 술을 빚어 팔았다. 세상과 단절한 채 그림에 전념하기로 다짐한 그의 눈에 비친 건 고향 울진의 태백산맥과 동해의 장엄한 아름다움이었다.

전시장은 16세기 지어진 퀘리니 스탐팔리아 재단 건물이다. 낡은 건물의 구조적 한계는 오히려 전시의 맛을 한층 끌어올렸다. 유영국의 전성기 작품을 모아놓은 3층. 헐떡이는 숨을 붙잡고 계단을 오르면 마치 산을 오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유영국의 정신을 함축한 새벽의 섬광과 변화무쌍한 산맥, 붉은 노을이 정상에서 관람객을 기다린다. 방탄소년단 리더 RM의 개인 소장품, 그리고 그동안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이건희 컬렉션 등 희귀 작품도 놓였다.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이건희 컬렉션 ‘새벽’(Dawn·1966)은 흡입력 있는 검정과 청색의 조화가 압도적이다.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작업’(Work·1999)은 전시장에 걸린 유일한 1990년대 근작이다. 빨강과 초록, 주황이 배치된 산의 형상을 자세히 관찰하면 가장 뒤편에 희미한 산자락 하나가 보인다. 말년의 작가는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딘가 다른 세계를 꿈꾸고 있었을지도. 전시 제목 ‘무한 세계로의 여정’처럼 말이다.
30년째 독보적 '숯의 화가' 이배…청도의 보름달 아래 불태우던 볏짚
5m 높이 돌기둥으로 '먹' 표현

베네치아 본섬 북쪽 끝, 운하와 연결된 빌모트재단 전시장. 좁고 어두운 복도에 어스름한 달빛 아래 타닥타닥 볏짚이 타는 영상이 음악과 함께 흘러나온다. 한 남자는 느린 몸짓의 춤으로 타들어간 불을 가른다. 영상 속 남자는 ‘숯의 화가’ 이배(67·사진). 영상을 지나자 새하얀 전시장에 시커멓고 반짝이는 숯조각 캔버스가 눈에 들어온다. 시선이 멈춘 곳은 5m 높이로 솟아오른 검은 화강암 기둥. 조각 뒤편으로 베네치아 운하와 연결된 통로에선 노란 달빛이 은은한 광채를 쏟아냈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공식 병행전시 ‘달집태우기’는 “한국의 먹을 세우고 청도의 달빛을 들여오고 싶었다”는 이배 작가의 개인전이다. 서울과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이배는 30여 년간 ‘숯’이라는 재료와 흑백의 서체적 추상을 탐구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숯이라는 재료를 탐구하기 시작한 건 1990년대 프랑스 유학 시절부터다. 숯가루가 섞인 먹물로 그린 회화, 숯을 형상화한 브론즈 조각 등으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프랑스 건축 명가인 빌모트재단이 초청하고 한솔문화재단이 공동 주관해 1년간 준비한 이번 전시는 작가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지난 2월 24일 정월대보름에 작가의 고향 청도에서 진행한 달집태우기가 그 서막. 달집태우기는 정월대보름 밤하늘 아래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빌던 민속 의례다. 한국의 먹을 형상화한 대형 돌 조각 ‘먹’(2024)은 설치에만 수개월 걸렸다. 운하 위에 지은 도시인 베네치아인 만큼 이탈리아 정부가 23t에 달하는 기존 작품의 설치를 쉽게 허가해주지 않았다.

“섬이 가라앉을 것을 염려해 현지 석공들과 수개월에 걸쳐 돌 안쪽을 파내 무게를 3t으로 줄여야 했습니다.”

작가는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관객들의 소원을 한지에 옮겨 적고 이를 불에 태워 다음 날 아침 숯이 될 때까지 촬영했다. 이 과정을 담은 비디오 설치작이 입구에 놓인 ‘버닝(burning)’이다. 대형 평면작품 ‘불로부터’(2024)는 전시장 안과 밖을 가로막는 경계 역할을 해낸다. 절단된 숯이 타일처럼 배열됐다. 한 달가량 1000도에서 태워 본연의 색을 잃은 나무는 오히려 크리스털처럼 매끄러운 광채를 발산한다.

내부의 벽면은 삶과 죽음, 순환 등 숯이 지닌 상징적 이미지를 극대화한 그의 ‘붓질’ 연작이 들어섰다. 짙은 검은색 먹 조각과 강렬한 대조를 이룬다. 달집태우기의 화염이 스치고 지나간 여백에 이배의 숯 작품이 들어서며 고요한 정적을 이끌어낸다. 천장과 바닥, 벽 전면에 사용된 종이는 이탈리아 명품 종이 회사 파브리아노가 후원했고, 전통 한지와 배접하는 방식으로 도배됐다.

노란 달빛에 반짝이는 작은 공간으로 이동해서 전시장 전경을 바라보면 새하얀 공간이 푸른색과 보라색으로 변한다. 작가의 염원대로 베네치아의 석호를 비추는 빛이, 고향 청도의 대보름 빛과 맞닿게 된 셈이다. 두 전시 모두 11월 24일까지다.

베네치아=안시욱/김보라 기자 siook9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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